본문 바로가기

사진

필름 카메라를 샀다.

사진 글이니까 사진으로 시작해야겠지? 한남동 CRATE COFFEE. (iPhone XR)

원래 사진 찍는걸 좋아하는 편이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썼던 허접한 카메라가 달려있던 폴더폰에도 앨범이 항상 그득했고, 성인이 되어 주변에 DSLR 들고 다니던 친구를 보면 뺏어서 열심히 무언가를 찍어봤었다.

 

사진 찍는게 어떤 점에서 좋은가? 이 질문의 답이 결국 무엇을 어떻게 찍고 싶은가로 연결되는 것 같다. 아직 답을 찾아나가는 중이지만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내린 결론은 '내 눈에 아름다운 어떤 대상'을 '나만의 관점, 시각, 프레임'으로 '포착 내지는 표현'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물론 아직 아마추어라고도 할 수 없는 카메라 입문자 수준이므로 이러한 미학적 논의는 차후로 미뤄두겠다. (완독을 재도전 중인 수전 손텍의 사진의 관하여를 리뷰할 때 다뤄봐야지.)

 

무튼 내 나름대로 위의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찍어봤지만, 스마트폰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스마트폰은 늘 들고 다니고, 사용법이 간편하고, 공유나 편집까지 가능하다는 어마어마한 장점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진을 위해 만들어진 장비가 아니다보니, 사진의 주변부가 왜곡된다거나 빛이 퍼지는 복잡한 느낌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모든게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우리 집 건너편 아파트. 스마트폰은 순간을 촬영하기도, 흑백으로 보정하기도 참 쉽다. (iPhone XR)

그래서 카메라를 사기로 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왜냐면 (1) 대체로 장비가 비싸고, (2)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의 취미이며, 결정적으로 (3) 결과물이 선명한 정물이나 화려한 풍경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카메라는 '저렴하고, 인기가 덜하고, 사진의 질감이 다소 거친' 종류, 다시 말해 필름 카메라였다.

 

결정적으로 필름 카메라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남필우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서이다. 세 편의 글에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필름 카메라로 찍힌 결과물들이 마음을 심하게 움직였다. 사진이 주는 다소 탁하지만 따뜻한 색감과 그 안에서 퍼져나가는 빛의 질감이 정말 좋았다. 구도가 조금 엉성하고, 수직과 수평이 맞지 않고, 대상이 주변의 사소한 것들일지라도 얼마든지 괜찮아보였다. 사실 그래서 더 좋았고, 어떤 면에서는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마지막에는 나도 저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잠깐 쉬어가는 시간. (iPhone XR)

그리고 거의 몇 주 동안 어떤 기종을 살 지, 어디서 얼마에 살 지 알아봤다. 작년에 차를 산 뒤로 이렇게 구매 대상을 열심히 알아본 것은 또 오랜만이었다. 정말 수십 가지의 기종에 대해서 장단점과 가격대를 알아보고, 그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은 여러 구매처에서 매물을 찾아보고, 판매자와 가격이 적정한지 또다시 확안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족이지만 카메라를 알아보다 깨달은 사실인데, 필름 카메라들은 대체로 촌스럽게 생겼지만 그게 정말 무진장 예쁘다. 사실 찍는 방법이고 결과물이고를 떠나서 다 사모으고 싶다는 충동이 자주 생긴다.)

 

그렇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남필우 작가님의 필름 카메라 입문서를 읽으며 마음을 빼앗긴 모델이 있었으니, 바로 야시카 일렉트로 35이다. 사각형 바디에 렌즈가 붙어있는 단순한 형태, 실버 바디에 요모조모 붙어있는 조그만 장치들, 섬세하고 정밀한 기계적 속성을 풍기는 고전적인 인상을 보고 첫 눈에 반해버렸다.

 

남필우 작가님 글에서 가져온 일렉트로 35 사진.

물론 나는 그렇다고 바로 해당 기종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이 친구는 장단점이 꽤 있는 편인데 이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면서 다른 기종과 마지막까지 비교해보고 구매를 결정했다. 먼저 일렉트로 35는 RF 방식인데, 이는 SLR 방식에 비해서 처음에 다루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그 방식 차이 때문에 SLR 카메라는 부피도 좀 더 크고, 렌즈도 분리되어 필요하면 갈아 끼워야한다. 물론 후자는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카메라 자체가 처음인데다 대부분의 물건을 고를 때 형태나 짜임새가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

 

입문용 SLR로 많이 추천되는 미놀타 X-700. 이것도 보다보니 예뻐서 사실 고민이다. (출처 : 로모그래피)

그러면 RF 카메라처럼 보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초보자가 다루기 쉬운 P&S(일명 똑딱이) 카메라는 어떤가? 똑딱이는 필름을 사용할 뿐, 작동 방식이 매우 쉽고 카메라 자체가 가벼워 나처럼 일상에서 스냅 사진을 찍기에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다들 엄청 귀엽게 생겼다.) 그러나 중고로 구매해야 하는데 한 번 고장나면 수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수동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카메라 작동 원리에 조금은 친숙해지고 싶다는 패기욕심도 있었다.

 

똑딱이 카메라들. 가운데는 캐논 오토보이. 다들 촌스러우면서 귀여운게 특징. (출처 : 로모그래피)

이렇게 RF 카메라로 마음을 굳힌 뒤 입문용 RF 카메라 중에서 몇 기종을 더 비교했다. 이미 위에서 결론을 말해버렸지만 내 선택은 야시카 일렉트로 35였다. 이 친구의 가장 손에 꼽히는 단점은 크고 무겁다는 것인데, 내 체구가 커서 이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반면 사진의 결과물이 괜찮은 편이고, 디자인이 내 취향이며, 무엇보다 각종 카메라샵이나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매물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매물이 많다면 그 중 판매자나 가격을 비교해서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를 수도 있고, 후에 다른 카메라로 갈아탈 때 판매하기도 수월하리라는 판단이었다.

 

일렉트로 35 내에도 다양한 모델이 나와있다. 나는 저 실버 바디에 꽂혔으므로 그게 가장 중요했고, 그 중 비교적 후기 모델인 GSN과 GX 중에서 보다 구하기 쉽고 저렴한 (대신 크고 무거운) GSN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결정하고 중고거래 플랫폼을 전전하다가, 결국 번개장터에서 좋은 분께 물건을 구매했다.

 

렌즈와 뷰파인더도 깨끗하고, 노출계와 배터리 체크도 잘 작동한다.
들고 다니다 너무 예뻐서 찍은 사진.

카메라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려고 급하게 한 롤을 찍어보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노출와 초점이 엉망이어서 건질 사진이 몇 장 없었지만. 이후로 절치부심하여 제주도 여행에서 신나게 두 롤을 찍어왔으나, 대부분을 날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야시카와 함께한 사진들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글을 남길 예정.

 

무튼 앞으로의 필름 카메라 생활 즐겁게 해보자!

 

첫 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Yashica Electro 35 GSN, 코닥 골드200, 망우삼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