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다.)
화제의 영화 <듄>을 봤다. 이미 영화에 대해 정말 수많은 전문적인 리뷰와 다양한 평가가 나와있는 지금, 한 발 늦은 감이 있지만 간략하게 개인적인 감상을 남겨본다.

일단 영화를 보는 내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대단한 눈호강이다. 첫째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정밀하게 시각화하여 펼쳐지는 모습에서다. 감독은 전작 <컨택트>나 <블레이드 러너>에서 신비로운 외계 생명체,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 등을 이질감 없이 유려하게 그려낸 바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마법 같은 현상이나 다양한 특징의 외계 문명들, 먼 미래 세계에서의 각개전투 등을 시종 웃음기 뺀 차분하고 진지한 톤으로 보여주면서, 과장되지 않은 정교함으로 깊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또한 특유의 불친절하지만 무게감 있는 각 씬들이 적절하게 전환되면서 주는 시각적 쾌감은 긴 러닝타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둘째는 방대한 스케일의 시공간을 스크린이라는 한 화면 내에서 체험하게 되면서이다. 주 무대가 되는 아라키스가 담긴 장면들을 보면 감독의 다른 전작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가 떠오른다. 사막과 멕시코의 모습이 얼핏 비슷하기 때문일수도 있겠으나, 그보다 두 영화에서 감독이 즐겨 사용한 버드 아이 뷰 앵글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영화 내내 주인공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장면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광대한 사막을 단순히 카메라가 직접 높은 시점에서 보여주는 것에 더하여 비행기 내의 주인공 시점에서 이를 한번 더 경험하게 하면서 관객들이 영화 속 세계의 거대한 스케일을 몸소 체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길게 말하면 무엇하랴. 현존 최고의 영화음악가이자 <인셉션>, <덩케르크> 등 스케일이 커다란 영화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 <인터스텔라> 이후 해당 OST만 들으면 우주에 가있는 기분이 들게하는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았는걸. 특히 <토르: 라그나로크>에 등장한 레드 제플린의 명곡 Immigrant Song이 떠오르는, 신비로운 여성 목소리를 위주로 한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메인 테마가 내뿜는 압도적인 사운드는 관객들을 사막 한 가운데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 친구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사실 본격 스타가 되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아직 안 봤는데, 그것까지 보고나면 게이가 될까봐 꾹 참아야하나 싶다. 뭐랄까 아직 너무나 유약하지만 공작 직위를 어쩔 수 없이 물려받게 된 덜 큰 어른 왕자이면서, 메시아가 될 수도 혹은 전쟁과 파국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비극적 운명에 고뇌하는 선택받은 자이면서, 냉혹한 현실에 맞서면서 점차 숨겨진 힘을 각성해가는 치열한 예비전사이면서, 한창 사춘기 아들이지만 어느새 듬직하게 엄마를 지키는 아들로서의 모습을 하나하나 다 담고 있는 얼굴이다. 당연히 이 친구가 연기를 워낙 잘해내기도 했겠지만, 이 역할에 이 외모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 감독의 장기를 마음껏 펼친 연출과 이를 감각적인 체험으로 극대화해준 음악, 그리고 전부 언급하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수많은 멋진 배우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활약이 있었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어느정도 이미 예상된 매력이다. 물론 이 세상에 기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영화가 얼마나 많겠으며, 기대치를 충분히 구현해낸 것 자체만으로 전세계의 찬사를 받고 있는 <듄>이지만 말이다.
결국 영화가 가진 아쉬운 부분은 원작에 대해 아쉬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과연 지금으로부터 무려 8천년 이상 지난 먼 미래에, 현생 인류가 지난 몇 천년 동안 답습해온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봉건제도를 다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과연 충분히 SF적인가? 기독교의 메시야 이후 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세상은 우리 과거와 진화론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조금 다른 세상은 아닐까? 결국 몸으로 부딪혀 싸우고, 강자가 약자를 탐하고, 정치적인 암투가 난무하는 이야기라면 결국 미래의 우주라는 탈을 쓴 <왕좌의 게임>인게 아니냐는 오명을 과연 <듄>은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소설이 원작인걸 어떡해.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라는 장르의 가장 멋진 부분을 조금씩 더 빛나게하고 있는 본 감독에게 사실 고마울 따름이다. 여기까지 두시간 반 넘게 눈호강 귀호강 다 했지만 정작 예고편만 보고 끝난 기분에 아쉬워서 적어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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