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벌써 버드맨이 개봉한지 곧 8년이다. 당시 (수상내역만 봐도 당연하지만) 국내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는지 후일을 기약하다가 지난 설연휴에야 보게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만족. 당분간은 이만큼 인상깊으면서도 재미있는 영화를 다시 만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운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어서 버드맨 이후로는 다른 영화들을 일부러 안보는 중이다. 어차피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감상과 해석이 지난 8년간 쌓여있을테니 나는 개인적으로 느낀점을 몇 가지만 적어본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연출 이야기겠다. 처음과 끝의 커트를 제외하고는 앵글이 인물에서 인물로 옮겨가며 마치 원테이크인듯 시점을 유지하는 기법은 영화 초입부터 상당한 흥미를 자아냈다. 혹시나 영화 '1917(2019)'처럼 기법은 가짜지만 리얼타임을 보여주려는건가 싶다가도, 중간중간 카메라 이동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상황이 빠르게 바뀌어있는 모습들이 나타나면서 한번씩 삶을 빨리감기시킨 것 같은 긴장감을 준다. 하룻밤이 지나갈때 하늘을 비추고 하늘색이 바뀐 뒤 지상의 모습으로 넘어가는 씬은 연극에서 막이 넘어가는 장면을 연상시키며, 시종일관 드럼 하나만 나오는 배경음악 역시 연극에 동반되는 단순하면서도 긴박한 라이브 연주를 떠올리게 한다. 이에 더불어 좁은 공간적 배경까지 더해 마치 연극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면서 영화의 소재인 연극 자체, 주인공이 연극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삶이라는 또다른 연극을 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감독의 시선 내지는 헌사를 상징하는 듯하다.
시점이 연극적인 것에 반해서 중간중간 판타지컬한 모습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주인공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의 공중부양이나 이후 보여주는 각종 초능력, 혹은 연극배우를 섭외하려 하자마자 에드워드 노튼이 도착해서 이미 대사를 줄줄이 외우고 있는 모습 등은 도저히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현실세계의 한 인물의 행적을 쫓고 있는데, 가끔씩 현실의 물리학 법칙이나 개연성을 깨버리니 여기서 괴리가 발생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멀미를 유발한다. 그렇지만 '버드맨'은 엄연히 영화 아닌가. 현실의 법칙 안에서 구현되는 연극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사실 이것은 영화라는걸 한번씩 깨우쳐주는 연출은 기분좋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에드워드 노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영화를 보면서 '파이트 클럽(1999)'이 많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으로 정신이 피폐해지고, 그러면서 소환된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와 갈등을 겪고, 결국 그 존재가 파멸되면서 온전한 자신을 되찾는 스토리라인에서 유사점을 많이 느낀 것 같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15년이 지난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 내공이 더욱 폭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비록 영화 내내 민폐덩어리에 사고뭉치로 그려지긴 하지만, 연기에 대해서 만큼은 뼛속까지 진심인 인물을 연기하는 그는 처음 주인공와 연극 연습을 맞춰보는 씬에서는(헐크 vs. 배트맨) 정말 소름끼치는 흡입력을 보여주었다.
상술한 기법적인 재미들 외에도 열린 결말에 대한 해석이나, 평론가 역의 린제이 던칸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히어로물에 대한 예술계의 촌철살인 등도 많은 논의를 불러올 수 있는 재미 요소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얼굴에 진짜 총을 쏘면서 연극에 대한 진심을 인정받는다는 영화속 작은 결말은 진지하기보다는 유머에 가까워보인다. 주로 예술영화를 찍었던 감독으로서는 막대한 자본으로 영화계를 삼키는 히어로물이나, 마치 절대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듯 영화를 천시하는 일부 평론가들 모두를 어느정도 풍자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의 장르적인 재미를 토대로 연극적인 요소들을 섞어 흥미로운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그걸 정말 즐겁게 봤다.
정리하자면 히어로물과 예술영화, 영화와 연극, 상업성과 예술성 등 너무 멀지만 또 서로가 필요한 개념들을 적절히 재료로 선택해서, 감독의 역량으로 눈과 머리가 동시에 즐거울 수 있는 기깔나는 연출로 요리하고, 연극적 요소가 담겼지만 결국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묘미를 살린 장르적 그릇에 잘 담긴 멋진 영화였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연극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버드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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