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한달이 넘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여러가지 변수도 있었고 내적 상태에 따라서 작문(作文) 욕구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감상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을 강력하게 부추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지난 크리스마스에 만났다.
일단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영화다. 그 와중에 두 남녀 사이에서 10여년에 걸쳐 벌어진 일들을 그려냈으니, 무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의 모습이 담겨있다. 당시 영화 필름의 영상미는 물론이요, 주인공들이 대학생부터 시작해 청년기를 보내며 입는 의상들이며, 배경이 되는 도시의 모습이나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 등은 당연히 촌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근 몇 년간 이어진 레트로의 열풍 속에서 영화를 보게되니, 오히려 그 어떤 시대보다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 같다. 특히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당대 최고로 멋부린듯한 여성을 보여주는 맥 라이언의 모습은 갓 어제 발간된 패션 화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30년 넘는 시간의 차이 때문에 더욱 눈호강인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무엇인가에 세월의 흔적이 더해지면 그것이 얼마나 더 멋지게 보이는지 깨닫게 해준다.
어차피 해리와 샐리가 주인공인 것은 영화를 보는 모두가 알고 시작하는 것이고, 결국 둘이 사귀냐 안 사귀냐가 영화의 유일한 궁금한 점이겠다. 하지만 이 영화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이유는 그 둘 사이에 12년 동안 켜켜이 쌓여가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그 흐름, 쉽게 말해서 두 남녀의 감정선이 정말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에게 와닿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익 관계가 겹쳐 서로 알게 되었지만 서로 질색하는 남보다 못한 사이, 수년 후 우연히 만났지만 가까스로 근황을 업데이트 했을 뿐 왜 서로 싫어했는지 다시 확인한 사이, 그리고 각자 커다란 아픔을 겪은 뒤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주며 연인보다 가까운 절친이 되어가는 과정까지. 이를 보여주는데 있어 영화는 어떠한 과장되고 극적인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 정말 누군가 주변에 있을법한 관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법한 상황으로 두 사람의 감정 깊이를 더해간다. 이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감정선이 우리에게 스며들었을때 비로소 마지막 씬에서 박수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주요 사건들의 배경이 겨울 뉴욕인데, 그만큼 크리스마스 시즌이나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마음을 따뜻하게 적시기에 아주 적절했다. 특히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나, 겨울에 집 안에 모여서 친구들과 연인들이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 등은 코로나로 경직된 마음에 잊고 지내던 사람들의 온정을 한 스푼 얹어준다.
영화 초반 남주의 트롤링을 보면서 과연 감정이입이 가능할까 걱정되는 영화, 당대 로코퀸 맥 라이언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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