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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내 마음대로 정하는 2021년 최고의 무엇.

연말이면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일명 '2021 아무개 어워즈'를 해보고자 한다. 내 마음대로 올해 경험한 것들 중에서 정하다보니 꼭 2021년에 새로 등장한 것들만 포함된게 아니라는건 함정.

 

 

올해의 TV 프로그램 <JTBC - 슈퍼밴드2>

 

여지없이 올해 최고의 TV 프로그램은 슈퍼밴드2였다. 사실 전편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보지 않았었고 슈퍼밴드2 역시 친구의 추천으로 뒤늦게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 탑밴드라는 프로그램의 아픈(?) 추억 때문이다. 밴드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시청했지만 당시 슈스케나 쇼미더머니 같은 굵직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비해서 대중화에 실패했고, 다양한 색깔을 가진 밴드들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테크닉인지 편곡인지 퍼포먼스인지가 엇갈렸던 것 같다. 이번 슈퍼밴드2에 나온 김슬옹의 톡식이 탑밴드에서 우승하는걸 지켜보며 나름 장르적으로는 만족스러웠지만 그마저도 논쟁의 여지를 남기기에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로그램 이름이 '슈퍼'밴드라니 이건 탑밴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개선되지는 않았으리라 단정했다.

 

그런데 왠걸, 각종 TV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친구로부터 내가 좋아하겠다며 클립을 몇 개 추천받았는데 완전 취향 저격이었다. 특히 내가 사로잡혔던 것은 (역시 취향대로) 황현조와 녹두가 참여했던 무대들인데 그 중에서도 녹두의 Forever Young 무대는 올해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에는 제이유나가 이끄는 포코아포코(現 포코)의 Higher Ground 무대를 보고 전율이 돋아 열심히 응원하다가, 결선에 가서는 크랙실버의 Home Sweet Home 무대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운이 좋게도 갈라 공연 티켓을 구해 출연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까지 누렸는데,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서 함성을 지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2021년 3분기를 행복하게 해준 슈퍼밴드2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올해의 음반 <Dave Brubeck, Paul Desmond - 1975: The Duets>

 

올해의 음반이라고 해놓고 옛날 앨범을 써놔서 좀 웃기긴하지만, 2021년 한 해 나에게 가장 감동을 준 앨범인 것은 사실이다. 사실 전자음악이나 락음악을 기반으로 한 팝음악 취향이던 내가 재즈를 듣게 된 것은 불과 1년 전 일이다. 나름대로 영화 <본 투 비 블루>를 보고 쳇 베이커의 음악을,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를 보고 OST를 들으며 약간의 기호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은 데이브 브루벡을 듣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술집의 댄스 플루어에서 연주되던 재즈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양지화하고 메이저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답게 음악이 다소 체계적인 인상을 주는데, 잘 계산된 포맷 안에서 주는 감성적인 울림은 역설적으로 더 오래가는 듯하다.

 

물론 데이브 브루벡은 Take Five로 유명하지만, 해당 앨범이 보다 수학적인데 반해 (Take Five의 실제 작곡가인 폴 데스몬드와 함께한) 이 앨범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데이브 브루벡의 피아노로 이루어진 아주 적당히 찰진 면발에 폴 데스몬드의 색소폰이 진한 사골 국물처럼 어우러지는 앨범. 특히 첫 트랙 Alice In Wonderland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순한맛의 천연 MSG 같다. 이들 덕분에 내 재즈 취향이 쿨재즈라는 것을 깨달았고, 곧이어 빌 에반스에도 푹 빠져 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의 음식 <엘픽 - 웻 에이징 스테이크>

 

10월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유일하게 미리 예약을 하고 방문했던 식당이 바로 엘픽이다. 원래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하와이에서 갔던 루스 크리스 이후 어디서도 만족을 못하고 있었는데, 무려 제주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스테이크를 만날 수 있었다. 셰프님이 30분 이상 직접 저온에서 구워 내주시는 이 스테이크는 처음 먹어보는 식감과 풍미였다. 흔히 생각하는 뉴욕 스테이크는 속칭 겉바속촉으로 크리스피한 겉면 안에 기름기가 잘 녹아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인데, 엘픽에서 맛본 것은 참치회에 가까운 부드러우면서 육질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식감이면서 고기가 가진 단백질 자체의 풍미에 좀 더 집중된 맛이었다. 캐치테이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뷰를 남긴 식당. 사장님이 장사가 힘드셔서 서울로 올라오신댔는데 조만간 다시 만나뵐 수 있으면 좋겠다.

 

이외에도 스페인 요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에 대한 통념을 깨면서 섬세한 맛을 보여준 북촌의 떼레노, 내장으로만 이루어진 오마카세라는 독특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역시 장소 이전을 계획중이셨던) 청담동의 호루몬 역시 인상깊었던 식당들이다.

 

 

올해의 영화 <왕가위 - 화양연화>

 

올해 초반이었나, 왓챠에 왕가위 감독 시리즈가 대거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 몇 편을 봤지만 나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화양연화>였다. 일단 감독에 대한 미장센의 대가 같은 수식어는 차치하더라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을 멈춰놓고 보면 하나하나가 멋진 스틸 사진이다. 필름의 색감, 화면의 구도, 배우들의 시선, 소품과 의상 등이 어우러져 특유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소 대칭적인 인물의 관계와 사건 구성은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와 탁월한 연출로 모든 것이 커버되는 듯하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 등의 OST는 미학적 쾌감의 방점을 찍는다.

 

 

올해의 책 <알렝 드 보통 -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목적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올해 책을 몇 권 읽었다. 그 중 가장 영감을 많이 준 것이 이 책이다. 알렝 드 보통이야 워낙 달필이지만 특히 저명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무겁지 않게 다루면서 우리 실생활에 적용하기 쉽도록 풀어쓴 것이 아주 좋았다. 예컨대 부동산 폭등이나 극단적 소비주의 사회 현상에 경종을 울릴 에피쿠로스, 코로나와 같은 대자연적 재앙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려주는 세네카, 인공지능과 로봇이 현실화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사랑하라는 몽테뉴 등과 같이 말이다. 철학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해 누구보다 깊고 치밀하게 고민한 결과물은 아무리 인간 사회를 둘러싼 껍데기가 발전하고 변화하더라도 그 핵심을 관통하는 메세지를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올해의 술 <아드벡 10년 (feat. 라프로익)>

 

싱글 몰트 위스키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접했지만, 피트한 입문용 위스키의 대명사 탈리스커 10년은 사실 새로운 경험이었지 새로운 취향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올해 1월 방구석 술자리에서 친구가 가져온 라프로익 10년을 맛본 뒤 그 담배나 정로환 같은 꾸리꾸리한 맛에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드디어 아드벡 10년을 전리품으로 가져오게 된다. 처음에는 바이킹족의 술처럼 생긴 외관과 그보다 진한 바다내음에 궁금함보다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술을 비우다 2/3병 정도 남았을 무렵, 어느 정도 에어레이션이 되면서 이 친구도 아주 풋풋한 달콤함을 품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아일라 지역의 라프로익과 아드벡 형제들을 제대로 접하면서 이제야 피트랑 좀 친해진 것 같다.

 

 

올해의 사건 <첼시FC - 2021 챔피언스리그 우승>

 

첼시를 응원한지 약 10년 정도 되었다. 사실 남들이 박지성 선수 때문에 프리미어리그를 보기 시작한 것보다는 꽤 뒤의 일이다. 주말 저녁이었나 TV에서 우연히 첼시 경기 중계해주는 것을 봤는데 당시 토레스와 아자르가 같이 뛰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도 삼성 로고가 가슴팍에 박힌 파란색 옷을 입고 말이다. 원래 축구는 좋아했지만 딱히 응원하는 팀이 없던 나는 그 뒤로 위닝이나 피파, 풋볼데이 등 축구 게임에서 늘 첼시를 선택했다. 시험공부 하면서 새벽에 경기도 챙겨보고, 자연스레 선수와 감독도 익숙해지며 그렇게 팬이 되었다. 2019년에는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였던 스탬포드 브릿지 방문 및 직관도 이루었다. (웨스트햄을 상대로 아자르가 두 골을 넣고 이겼다.)

 

첼시는 감독을 자주 바꾼다. 그 모든 것은 단기적인 성과를 위해서다. 이에 대해서 해축 팬마다 의견이 갈릴 수는 있지만, 덕분에 리그 우승은 종종 하고있다. 하지만 내가 첼시 경기를 챙겨본 이래로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바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다. 내가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 하필 처음이자 마지막 챔스 우승 직후였기 때문이다. 나름 리그나 컵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려도 빅이어의 상징성을 뛰어넘기는 어려워 더욱 그랬다. 사실 지난 시즌은 (영원한 캡틴) 램파드 형이 안타깝게도 중간에 낙마하면서 팀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므로 더더욱 챔스에 대한 기대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왠걸, 본선 진출을 물려받은 투헬이 팀을 빠르게 재정비하면서 무려 결승에 진출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한두시간 쪽잠을 잔 뒤 힘겹게 본 결승전 결과는 (하베르츠의 이적료 일시불 골과 함께) 무려 리그 최대 경쟁자인 맨시티를 상대로 극적 1-0 승리. 올 한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 외에도 올해의 사진, 올해의 뻘짓, 올해의 소비 등 꼽자면 많지만 가장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들 위주로만 골라봤다. 나름 한해를 정리하는 느낌도 들고 앞으로 꾸준히 정해보면 재밌겠다. 내년에는 보다 풍성하고 행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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