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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아침 기차에서.

아침 기차에 몸을 싣는다. 월요일 아침이면 늘 타는 이 기차. 익숙한 발걸음으로 내 자릴 찾아갔는데, 건너편에 강한 억양의 아주머니 세 분이 앉아계신다. 워낙 친해서인지 아니면 다투시는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높은 언성으로 끝없이 대화를 나누시는데 귀에 팍팍 꽂힌다. 작게 한숨도 쉬고 헛기침도 해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뒷자리에는 커플이 앉더니 좌석에 달린 간이책상을 줄곧 덜컹거리며 여닫는다. 휴, 오늘 잠은 다 잤다. 다음부턴 꼭 끝 열차의 구석 자리에 앉아야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안경을 벗고 에어팟을 귀에 꽂는다. 얼마전 나온 위켄드 새 앨범을 들어본다. 라디오를 진행하는 컨셉인가보다. 수년 전 같은 감동은 없지만 늘 그렇듯 실망시키진 않는다. 옆에서도 들릴 정도로 볼륨을 키운다. 이 공간에서 전해지는 정보와 자극에서 점점 멀어진다. 괜히 손으로 이마와 콧등을 비비며 초점을 창 밖 불특정한 곳으로 던진다. 망상에 빠진다.

요즘들어 문득 (젊은 나이에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보고나면 더욱) 지난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주로 20대의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 아쉬움이 남는 일들이다. 당시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어떻게든 대충 넘긴 것 같아서 크건 작건 후회가 남는 일들. 당시에는 선명하게 인지하지 못했으나 내 감각이 무의식 한 켠에 자국을 남겨둔 주변인들의 실망스런 표정까지 느껴져 더욱 부끄럽다. 아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며? 나쁜 일들은 잊혀지고 과거는 미화되어서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거라며? 그런데 왜 과거의 불완전했던 나에게 이렇게 미련을 갖는 것인가.

천성적인 게으름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 족적을 남기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망. 존재의 유한함과 불완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작디 작은 지구의 짧디 짧은 내 생 안에서 점 하나라도 남기고 싶다는 거만한 생각이 늘 나를 뒤쫓는다. 하지만 나약한 존재의 그것인만큼 유약한 자존심 때문인지 전심으로 직면하며 도전하고 실패하고 평가받기가 두려워 매번 최선을 다하지 않고 회피해온 것도 같다. 최선을 다할 에너지와 재능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모든걸 알고 일지만 단지 '무엇인가 하고있다'며 자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시간을 허비하기 싫다는 말은 그저 말 뿐인 허무한 외침이었니보다.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살다보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스스로 재가 될때까지 불태울 열정이 솟아날 것이라 믿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도 바라왔다. 그래서 이렇게 취향을 탐색하겠다고 발버둥인지 모른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무엇인가? 내 몸인가? 내 사회적 관계와 위치인가? 내 사고와 감정인가? 내가 누구인지 아니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김상욱 교수님의 시간에 대한 강의 영상을 시청한 적 있다. (이후 시간의 역사는 읽다가 포기했다.) 내가 어렴풋이 이해한 바로는, 시간은 따로 그 독립적인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변화에 수반되는 동전의 앙면 같은 개념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인지한 내용들이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배열되거나 조합되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 자신은 타고난 (뇌세포를 포함한) 신체의 끊임없는 변화와 외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축적된 기억들(과 그 학습효과)의 총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창 밖이 점점 환해진다. 어두웠던 풍경에 대한 내 기억은
시간이 지났다는걸, 그렇다면 목적지에 가까워졌으리란걸 유추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고보니 바깥 풍경을 이전에도 지나가며 본 것도 같다. 어느덧 위켄드가 지나가고 모짜르트가 나오는 에어팟의 볼륨을 줄이니 여전히 담소를 나누시는 아주머니들 목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들으니 정겨운 것도 같다. 지금 내 모든 사고와 감정은 이전의 나에게 기반한다. 그것이 사소하지만 짜증나는 아침의 사건이든, 사무치게 아쉬운 과거의 내 모습이든 그들은 이미 나를 구성하는 일부인 셈이다. 다만 나에게 주어진 것은 앞으로의 선택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