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한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렇듯 컴퓨터 앞에서다. 일을 할 때에는 지속적으로 모니터를, 정확히는 컴퓨터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를 계속 주시하며 그에 따라 새로운 입력을 한다. 일하다가 틈이 생기면 웹서핑을 한다. 가벼운 유머글을 보기도 하고, 요즘 유행한다는 것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정치와 시사 관련된 뉴스나 글을 읽기도 한다.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유튜브도 본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며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클립 몇 개를 보다보면, 어느새 추천 동영상을 연달아 시청하고 있다.
지하철을 탄다. 출퇴근 길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한번도 떼지 않고도 걸어다닐 수 있다. 시선이 액정 위에 있어도 주변의 위험물을 무의식 중에 살펴볼 수 있는 우리 시각의 위대함이란. 새로 온 카톡이나 메세지, 이메일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일과 중에 컴퓨터로 보거나 핸드폰을 틈틈이 열어보며 전부 섭렵한 내용들이다. 더 이상 볼 내용이 없고 핸드폰이 점점 따뜻해져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액정에 시선을 떨구고 있다.
혼자 저녁을 먹는다. 기운이 없어 양심은 잠시 내려놓고 배달을 시키든, 간만에 장도 보고 후라이팬도 잡아 나름 그럴싸한 상을 차리든 내 맞은편 자리는 핸드폰이 차지한다.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비할수록 더욱 핸드폰을 찾는다. 그리곤 내가 식사에 거는 기대에 부응할 만한 재밌는 영상이 함께해야 한다. 입 한가득 먹을 것을 밀어 넣은 후 입 안에서 느껴지는 미각의 즐거움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청각 정보가 주는 쾌락적 자극으로 대체된다. 실컷 식사가 끝나고 나면 씹고 맛보고 냄새 맡는 행복감은 기억에 없고 그저 포만감만 남는다.
운동을 하러 나간다. 가장 중요한건 러닝화, 그 다음은 이어폰이다. 그 날 날씨와 기분, 컨디션에 적절한 음악을 찾는다. 혹여나 뛰는 시간에 비해서 총 재생시간이 부족하지 않도록 넉넉하게 플레이리스트를 채운다. 달리는 동안 내 숨쉬는 소리나 심박 소리는 아주 잠깐씩 한 곡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조용한 틈에만 들린다. 빠르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에너지 레벨도 올라가며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반대로 미디움 템포의 그루비한 음악이 나오면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달린다. 음악에 집중하지 않는 때는 NRC에서 페이스를 알려줄 때 뿐이다.
잠자리에 든다. 불 끄고 누워 이불을 덮는다. 자기 전 가장 중요한 것은 알람 설정이다. 어쩔 수 없이 핸드폰 잠금을 풀고 알람을 맞춘다. 그러고보니 내일 아침에 뭐입지? 날씨를 켠다. 내일 기온과 강수량 등을 확인한다. 그러고보니 뭔가 미뤄둔 할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메모장에 들어가 내일 처리할 일들이 있었나 확인한다. 홈 화면으로 나오니 자연스럽게 엄지 손가락이 사파리를 누른다. 즐겨찾는 사이트를 차례대로 들어가 새로운 글이 없나 확인한다. 당연히 없다. 유튜브에 들어가 구독 중인 새로운 동영상이 없나 확인한다. 시간이 흐른다. 다시 알람에 들어가 일어날 시간을 5분 늦춘다.
우리 뇌는 체중의 2% 정도 무게를 가지지만, 신체가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의 20%를 사용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현대인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끝없는 자극에 노출되고 있다. 그러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뇌의 일부를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쉬지않고 뇌에서 에너지를 사용하다보니 운동은 커녕 퇴근 후 집에서 계속 쉬어도, 혹은 잠을 많이 자더라도 깊이 잠들지 못해 몸이 피곤하다. 하지만 섭취하는 음식 중 뇌에서 사용하고 남은 에너지는 몸(정확히는 근육)을 사용하질 않으니 전부 살로 축적된다.
피로와 체질 악화는 어찌보면 가벼운 문제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외부 자극을 받으며 그때마다 나오는 도파민에 절여진 우리 뇌는 이제 자극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자극이 없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 뇌를 사용하다가 틈이 나도 또 다른 매체를 찾고, 이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심지어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쉬지않고 새로운 자극을 탐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선도적인 기업들은 백성들의 이런 고충을 해결해주고자 OTT, SNS, 비디오 클립 등 원없이 새로운 컨텐츠를 저렴하게 배급해준다. 단지 백성들이 광고를 조금 봐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
추정컨데 원시시대에는 불이 텔레비전의 역할을 했다고들 한다. 쉬지않고 형태를 바꾸며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전해주니까. 그리고 아직 그 시절의 인체에서 진화적으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들 중 일부는 이른바 불멍을 하기 위해 캠핑을 떠나기도 한다. 하늘이 까맣게 변하고 주변의 빛과 소리가 사그러들면 커다란 불을 피우고 그 앞에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불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이외의 잡념들은 멈추게 되고, 단순하고 약한 자극만 받아들이며 뇌는 에너지 소모가 적어진다. 결국 자연스럽게 멍한 상태가 되다보니 불멍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나처럼 캠핑이 아직은 다소 불편하고 먼 사람들은 바다나 한강을 찾을 수도 있다.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모습, 해가 떨어지며 하늘의 색이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 모두 원시 사람들도 즐기던 수준의 자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머리에 걸려있던 과부하가 멈추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시나마 이런 시간을 가지면 남는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인지 몸도 가뿐하다. 산책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오로지 산책에서 얻는 사고만이 가치를 지닌다."라고 니체가 말했던가. 오로지 걷는 행위, 즉 발이 땅에 닿는 느낌과 다리의 움직임에 집중하다보면 뇌는 자유로워지고 창의적 사고를 만들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리추얼의 유행과 함께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 같다. 명상을 가볍게 접해보면, 대부분 호흡이나 신체 일부분에 의식을 집중한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에 집중하면서 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끝없는 대사 활동을 잠깐 줄여준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던, 그래서 새로운 자극원을 찾거나 끝없는 걱정과 고민을 지속하던 우리 뇌는 모처럼 휴식 시간을 가진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 거리두기와 멈춤이 필요한 것처럼, 뇌 안에서도 뉴런들이 잠시 거리를 두면서 해방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멍 때릴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인이 시간을 내려면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비워내야 한다. 건강을 위해 짬내서 헬스장에 등록하듯 멍하니 있을 시간, 즉 비용을 따로 내야한다. 단 5분도 쉬지 못하는 뇌가 잠시라도 편안한 상태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한다. 할 일이 없는 순간이 오면 멍 때리고 가만히 있어보자.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모니터와 핸드폰 화면을 끄고, 뇌의 일부분도 잠시 끄는 것이다. 비효율을 위시한 최고의 효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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